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

이름:최제우

출생:1824년

최근작
2024년 5월 <용담유사>

최제우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1824년에 부친 근암 최옥과 모친 곡산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학문은 깊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몰락 양반 출신이었고 모친은 재가녀(再嫁女)였다. 당시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과거 중에서 문과에는 응시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수운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운은 부친의 두터운 사랑과 후광 덕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특히 퇴계(退溪) 선생으로부터 부친 근암으로 이어진 퇴계학(退溪學)의 학풍을 충실히 계승하는 학문적 수련을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경제적 후원자였던 부친이 수운의 나이 17세 때인 1840년에 사거(死去)하자 그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신세가 되었다. 유일한 버팀목이던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수운은 한가롭게 학문이나 하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집안 살림을 꾸려 가야 했고 가족들도 돌보아야 했다. 이에 수운은 한때는 무과(武科)에 응시하고자 무예를 익히다가 그만두었고, 또 한때는 경상도 남부 지방에서 나는 원철(原鐵) 도매상을 열어 생계를 도모하려다 망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가산은 거듭된 사업 실패로 다 날려 버렸으며 물려받은 집마저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20세 이후부터는 전국을 방랑하며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절치부심하며 구도 행각에 나섰다. 1855년에는 경상남도 양산(梁山)의 천성산(千聖山)에 있는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수련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얻고자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수운은 1859년 36세 되던 해에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10여 년간 지내 왔던 오랜 처가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고향 경주 용담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수운의 삶은 ‘소업교위(所業交違)’, 즉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하는 일마다 실패한’ 인생이었다. 이것이 바로 동학 창도 직전 수운의 자화상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해인 경신년(1860) 음력 4월 5일에 수운은 부친이 물려준 용담서사(龍潭書舍)에서 이상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몸이 몹시 떨리고 한기(寒氣)를 느끼는 가운데, 공중에서 무슨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일이라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의 주인공을 찾아 문답을 나누기 시작한다. 아무런 형체도 없이 공중에서 말씀하는 그 주인공은 바로 단군 이래 이 땅의 민중이 늘 마음으로 모시고 받들어 온 ‘하늘님’이었다. 수운 선생이 이날 하늘님과 문답을 나누며 ‘내림’, 즉 강령(降靈)을 체험한 과정은 동학의 한글 경전 《용담유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림 체험, 즉 강령 체험을 통해 수운은 하늘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 즉 천도(天道)를 받았다. 또 21자 주문(呪文)과 영부(靈符, 신령한 부적)도 함께 받았다. 하늘님은 특히 주문과 영부를 가지고 민중을 가르치면 스스로 장생할 뿐만 아니라 천하에 널리 덕을 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수운에게 포덕(布德, 포교와 같은 뜻)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수운은 아무리 믿으려 해도 내림 체험 과정에서 나타난 하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림 체험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하늘님이 말씀하신 내용대로 실행해 보면서 그 효과를 검증해 보기에 이른다. 1년여에 걸친 수련 결과, 과연 하늘님 말씀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이에 1861년 6월부터 수운은 동학의 가르침을 전하는 포덕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수운이 포덕을 시작하자마자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재해, 콜레라와 같은 괴질의 주기적 유행, 이양선(異樣船) 출몰과 천주교의 전파에서 오는 위기의식 등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민중은 ‘용담에서 신인이 났다’며 다투어 수운을 찾아와 나아갈 길을 묻기 시작했다. 수운이 동학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한 1861년 6월 이후 민중들은 동학으로 다투어 들어갔다. 그 결과 수운이 도를 펴고 있던 경주 용담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던’ 세상을 안타깝게 여기는 민중의 귀의처가 되었고, 수운은 그런 민중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신인(神人)이자 진인(眞人)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이 같은 민중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도리어 수운을 체포해 처형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수운은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3월 10일에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 장대(將臺, 경상감영의 훈련장)에서 삿된 도로 민중을 현혹했다는 이른바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때 이른 죽음이자 가슴 아픈 죽음이었다. 이로써 수운은 동학을 창도한 지 4년 만에, 그리고 1861년 6월부터 정식으로 동학의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공적(公的) 생애를 죽음으로써 마감하기에 이른다.  

대표작
모두보기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