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

이름:윤백남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888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

사망:1954년

최근작
2022년 11월 <불멸의 문장들>

윤백남

1888~1954. 한국의 소설가, 극작가, 연극 영화인. 본명은 교중(敎重), 기타 미봉(眉峰), 태백남인(太白南人) 등. 충남 공주 출신.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다. 1903년 한성부로 올라와 경성학당 중학부 졸업,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6년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 예과 졸업, 1910년에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11년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했다,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신파극 극단인 문수성을 창단하여 번안 신파극을 공연하고 배우로도 활동했다. 잡지사 반도문예사를 설립하여 월간 잡지 ‘예원’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입사하였고, 매일신보에 단편소설 ‘몽금’을 발표하였다. 연극론과 희곡을 발표하고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자신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촬영했다. 윤백남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으며, 민중극단 배우였던 이월화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영화 ‘운영전’, ‘심청전’ 등을 연이어 발표하였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자 192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1930년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대도전’이 큰 인기를 끌면서 윤백남은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30년대에는 야담 운동에 뛰어들어 많은 야담 작품을 발표했고, 1934년 10월 월간야담을 창간했으며, 1937년에 만주로 이주해 역사소설을 썼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6·25사변 중 해군 중령으로 복무, 1953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맡고,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 회원을 지냈다. 1954년 9윌 2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연극, 영화,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 문화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장편 역사소설 ‘봉화’, ‘흑두건(黑頭巾)’, ‘해조곡(海鳥曲)’, ‘백련유전기(白蓮流轉記)’, ‘낙조의 노래’, ‘회천기(回天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등과 희곡집 ‘운명’, 저서 ‘조선야담전집’, ‘조선형정사(朝鮮刑政史)’ 등이 있다.  

대표작
모두보기
저자의 말

<회천기> - 2013년 2월  더보기

모든 역사적 사실을 지금의 사람으로서 따져 볼 때에 그 어디까지가 정곡한 사실이며 어느 점이 허위의 사실인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어떠한 사실과 그의 중심되는 인물의 행장을 살펴볼 때에는 그 당시의 시대성(時代性)과 환경, 그리고 여러 가지의 단적 사실에 의하여 나타나진 중심 인물의 성격을 판단하여 그의 모든 행동의 심적 요소를 줄쳐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가장 자유스러운 표현 방법이 곧 소설의 형식일 것이며, 전기(傳記)가 가지지 못하는 입체적 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동학당(東學黨) 사건은 근대 조선의 혁명적(革命的) 봉화의 가장 큰 사건이었으며, 밖으로는 조선을 밥거리로 삼는 일청(日淸) 두 나라의 각축과 암중 모략, 그리고 안으로는 대원군과 민중전(閔中殿)의 알력, 그리고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진 특권 계급의 평민 착취가 극도에 오른 때이었기 때문에, 이 동학당 사건은 혁명을 일으키기에 가장 적절한 모든 조건을 갖추어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전봉준(全琫準)의 회천(回天??형세를 일변시킴) 대업(大業)은 실패하고 말았으니,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그 원유되는 바를 찾아보는 것도 또한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오랫동안 장편 집필을 중지하고 있던 필자가 다시금 모자란 붓을 들게 된 소이는, 오로지 위에 말한 바 ‘인간 전봉준’을 그리어 보자는 열의에서 나온 것을 양해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